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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오천면
구분 지명유래
내용 鰲川面 (오천면)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사촌현(沙村縣)이라고도 부른다)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해서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이였었다.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고, 태조(太祖) 5年에 수군첨절도사(水軍僉節度使)의 고을이었다. 세종(世宗)3년에는 도안무처치사(都安撫處置使)의 고을이였다가, 세조(世祖)12년에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고을로 충청수사영(忠淸水使營)이 있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보령군(保寧郡) 금신면(金神面)의 지역(地域)인데, 조선(朝鮮) 26代 고종(高宗) 광무(光武) 5년(1901)에 충청수군절도사영(忠淸水軍節度使營)터를 중심으로, 오천군(鰲川郡)을 신설하여 하서(河西), 하남(河南), 천동(川東), 천북(川北)의 네면(四面)을 관할하는 군청(郡廳)의 소재지(所在地)로 오천(鰲川) 동쪽이 되므로 천동면(川東面)이라 하여 군서(郡西), 군동(郡東)외에 25개(個), 동리(洞里)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에 효자도(孝子島)외 23개리(個里)와 하서면(河西面)의 고대도(古代島)외 17개리(個里)와 장척면(長尺面)의 조곡(鳥谷), 구수(九水) 2개(個)동리(洞里)를 병합, 오천군(鰲川郡)의 이름을 따서 오천면(鰲川面)이라 하여 소성(蘇城), 영보(永保),오포(烏浦), 교성(校成), 갈현(葛峴), 효자도(孝子島), 원산도(元山島), 삽시도(揷矢島), 녹도(鹿島), 외연도(外煙島)의 10個里(개리)를 관할하며 보령군(保寧郡)에 편입(編入) 되었다.`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오천면이 되었다.

鰲川八景(오천팔경)

오천(鰲川)에 수사영(水使營)이 있을 때 경치가 아름다운 곳 8개소(八個所)를 골라서 「오천팔경(鰲川八景)」이라 하였다.

1. 한산사(寒山寺)

2. 고소대(姑蘇臺)

3. 구양루(丘陽樓)

4. 황학루(黃鶴樓)

5. 상사봉(相思峰)

6. 오류봉(五老峰)

7. 영보정(永保亭)

8. 선림사(禪林寺)

蘇城里(소성리)
백제(百濟)때는 新村縣(신촌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新邑縣(신읍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保寧縣(보령현)에 속했었다. 朝鮮(조선)시대에는 太祖(태조) 5年에 水軍節度使(수군절도사)의 고을이었으며 世宗(세종)3年엔 도안무처치사(都安撫處置使)의 고을이었다가, 世祖(세조)12年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고을이었다. 李朝末葉(이조말엽)에는 오천군(鰲川郡) 천동면(川東面)에 속했다가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군서리(郡西里), 군동리(郡東里), 내웅리(內雄里) 일부를 병합하여 이곳에 있는 고소성(姑蘇城)의 이름을 따서 소성리(蘇城里)라 하여 보령군(保寧郡) 오천면(鰲川面)에 편입 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로 되었다.

新 村((신촌)

선림사(禪林寺)아래에 자리한 마을을 「신촌(新村)」이라고 부른다. 마을앞으로 넓은 들이 있어 부유한 마을이며 새로 생겼다 해서 「신촌(新村)」이라고 부른다. 「싱기댕이」라고도 부르는데 수군영(水軍營)이 있을 때 외곽을 지키는 초소가 있었던 마을이다. 禪林寺(선림사)는 眞平王(진평왕)(新羅(신라)) 迷福(미복)7年(192)年 創建(창건)된 오래된 절이다.

雙烏島(쌍오도)

소성(蘇城) 마을앞 천북(川北)쪽을 바라보고 북쪽으로 섬이 둘이 있는데 이 섬을 「쌍오도(雙烏島)」라고 부른다. 섬이 둘이 있는데 섬 하나는 오천(鰲川)에 하나는 천북(川北)쪽에 있다. 모두 까마귀를 닮아서 두 섬을 「쌍오도(雙烏島)」라고 부른다.

永保亭(영보정)터

소성(蘇城) 북쪽에 亭子의 터가 있는데 여기를 「永保亭(영보정)터」라고 부른다. 이곳에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이 생길 때 지은 정자(亭子)로 朝鮮時代(조선시대) 詩客(시객) 박은(朴誾)이 詩(시)를 읊었고, 朝鮮(조선) 英祖(영조)때 「만화당(晩華堂)」유진한(柳振漢)의 詩(시)로 유명한 정자인데, 바다를 보니 산다는 보람이 더욱 느켜지고 하늘을 보니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詩句(시구)로도 유명한 시인 묵개의 절찬하는 정자였다 한다.

오리장터골

「작은산냇골」동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작은산냇골」이라고 부른다. 李朝(이조)때 五里亭(오리정)이란 정자가 있어서 「오리정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오리장터골」이라고 부른다.

오천항(鰲川港)

소성(蘇城) 서북쪽으로 廣川(광천)까지 들어가는 강물앞에 천북땅을 바라보고 자리한 선창을 「오천항」이라고 부른다. 백제(百濟)때부터 배가 드나드는 항구로 백제때는 당(唐)나라를 다녀오는 중이 이곳을 통해 사비(泗泌)로 들어가면서 갈매기에 묻혀 땅을 밟았다는 기록도 있는 항구인데, 고려(高麗)때는 자주 서해를 침범하는 오랑캐를 무찌르기 위해 군선이 머물었던 곳이기도 하다. 천연적으로 파도를 피하는 아늑한 자리에 몸을 감출 듯 자리해서, 바다에서도 잘 안보이고 육지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앉아있는 항구와 조선(朝鮮)시대에 충청수사영(忠淸水使營)이어서 군선(軍船)이 백여척(百餘隻)이 항상 정박하였떤 군항이기도 하였던 수군(水軍)3000餘名이 항상 주둔하였던 큰 군항이었다. 일제말엽(日帝末葉)부터는 섬에서 광천시장(廣川市場)으로 드나드는 장배가 5日마다 범선(帆船)으로 백여척(百餘隻)이 드나들어 黃布(황포) 白布(백포)돛대의 정경을 이루던 항구이기도 하다. 청일전쟁(淸日戰爭)때는 일본군함 27隻(척)이 정박하기도 했었다.

원 전

「東門(동문)밖」東北(동북)쪽으로 샘이 있는데 이 샘을 「원전」또는「원정」이라고 부른다. 샘물이 좋아서 조선(朝鮮)때는 수사(水使)가 주로 마셨으며 많은 사람들이 다른곳에서 이 물을 마시러 모여들기도 하였다. 물이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라 한다.

장 터

「소성」東北(동북)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장터」라고 부른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장이 크게 섰던 자리에 지금은 마을이 들어서 있다.

중 말

「소성」중앙에 자리한 마을을 「중말」또는「중촌」이라고 부른다. 李朝(이조)때 수군사영이 이곳에 있을때는 기와집만 즐비하게 서있던 자리라 한다.

성 터

「소성」주위에 있는 성터, 「오천성곽지」,「수군절도사영성」,「고소성터」라고도 부른다. 朝鮮(조선)11代王(대왕) 中宗(중종) 5年(1510)에 돌로 성을 쌓아서 둘레가 3,174尺(척) 높이가 11尺(척)이나 되는 큰 성이였다. 東西南北(동서남북)으로 성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西門(서문)만 남아 있다.

서문밖

「소성」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서문밖」이라고 부른다. 성문서쪽으로 밖에 있는 마을이다. 등성이를 넘으면서 서해(西海)가 한눈에 보이는 마을이다.

산냇골

「오리장터골」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산냇골」이라고 부른다. 골짜기 고랑이 새끼줄을 틀어놓은 것 같다해서 「산냇골」이라고 부른다.

빙허당(憑虛堂) 터

永保亭(영보정)터 곁으로 당터가 있는데 여기를 「빙허당터」라고 부른다. 수군사영(水軍使營)이 있을 때 「빙허당(憑虛堂)」이란 당이 있어서 선비들이 즐겨 어울렸던자리다.

梅竹堂(매죽당)터

永保亭(영보정)터 동쪽에 자리한 당터가 「梅竹堂(배죽당)」이 있었던 자리다. 朝鮮(조선)때 水使營(수사영)이 자리한 오천에 水使(수사)의 客(객)들이 찾아오면 담소하며 글을 나누던 곳이다.

東門(동문)밖

「소성」동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東門(동문)밖」,「東門(동문)외」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성문밖 동쪽에 자리해 있는데 성터자리 아래부분에 화석이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당 재

군동리에서 교성리(생젓굴)로 가는 고개를 「당재」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成徨堂(성
황당)이 있어서 크게 堂祭(당제)를 지내던 고개다.

가는샘

「당재」기슭에 샘이 있는데 이샘을 「가는샘」이라고 부른다. 이 샘물을 끌어다가 「소성」마을 전체의 음료수를 쓰고 있다.

禪林寺(선림사)

「큰산냇골」동쪽 「싱기댕이」위쪽으로 자리해 있는 절이 「선림사(禪林寺)」다. 保寧郡內(보령군내)에선 오래된 寺刹(사찰)로 절의 역사는 당(唐)나라에서부터 연유(緣由)를 찾는 절이다. 「선림사(禪林寺)」의 창건(創建)은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7年(590)으로 지적하는데, 당시 唐(당)나라와 가까운 거리에 있던 서해(西海)로 통해서 僧侶(승려)들의 往來(왕래)가 잦았었다. 선편(船便)으로는 서산(瑞山), 안흥(安興)과 그 부근에서 자주 往來(왕래)하였지만, 가까운 거리로 오천(鰲川), 웅천(熊川)을 통하는 경우도 많았다. 「선림사(禪林寺)」의 창건을 신라(新羅)의 담화선사(曇和禪師)로 봄으로 불교문화(佛敎文化)가 신라(新羅)로부터 번지는 문화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백제문화(百濟文化)가 新羅(신라)의 佛敎文化(불교문화)보다 월등했다는 사실로 보아서도 백제영역(百濟領域)은 신라(新羅)의 승려(僧侶)가 절간을 창건하였을 뿐 불교문화의 수준(水準)은 百濟領域(백제영역)에서 월등했다는 사실이다. 禪林寺(선림사)의 위치는 山麓(산록)에 자리해서 바다의 일면을 보는 절경지에 자리하고 울창한 숲에 자리해 있다. 산의 중폭에 자리해 있는데 시인 묵객이 이곳을 지나다가는 멈추지 않을수 없는 곳이기도 하며, 또한 鰲川八景(오천팔경)의 하나로 꼽는 禪林寺(선림사) 鍾(종)소리 또한 바다 건너편까지 퍼져서 西方(서방) 百里(백리)를 깨우치는 鍾(종)소리로도 통한다. 오랫동안 불교 도장으로써 오랜세월을 보냈으나 건물(建物)자체가 고전성(古典性)을 지녀서 문화적 가치가 있으며 朝鮮(조선)때 내려와서 哲宗(철종)11年(1860)에 重修(중수)하여 옛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 주기도 하는 寺刹(사찰)이다.

建物(건물)은 27坪(평)의 목조와가(木造瓦家)로 법당(法堂)은 웅장하고도 한적하며 수도전당(修道殿堂)의 품격을 갖추었다. 창송노수(蒼松老樹)로 아름다운 絶景(속에서 흘러나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山아래에 펼쳐진 서해창파(西海蒼波)상에 떠도는 고깃배를 보는 맛은 그야말로 他(타)에 比(비)할수 없다 하겠다. 많은 관광객(觀光客)과 공부하는 학생들이 찾아드는 절이기도 하다.

永保里(영보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해서 이조말엽(李朝末葉)엔 오천군(鰲川郡) 천동면(川東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율변동(栗邊洞), 갈마현동(葛馬縣洞), 우티리(牛峠里), 석소탕동(石所湯洞), 우포리(牛浦里), 진곶지리(津串之里)를 병합하여 영보리(永保里)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오천면(鰲川面)에 편입 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로 되었다.

가승구지

「소해」西南(서남)쪽 바닷가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가승구지」라고 부른다. 옛날엔 元山島(원산도)와 또한 다른 섬과 왕래하는 나루터여서 원산도(元山島) 사람들이 육지에 오를 때 처음 발을 디디는 곳이라 하여 진곶지(津串之)라 불렀다 한다. 그후에 변해서 「가승구지」라고 부른다.

갈마무시

「소해」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갈마무시」라고 부른다. 마을에 가마음수형(葛馬飮水形)의 명당이 있다해서 「갈마무시」「갈마연」「갈마음수」라 부르는 마을이다. 수사영 당시 형장으로 쓰여진 곳이며 天主敎人(천주교인) 殉敎碑(순교비)가 있다.

밤까시

「갈마무시」東北(동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밤까시」「율변」이라고 부른다. 三面(삼면)은 산이 가리고 한면만 바닷가인 곳으로 마을에 밤나무가 많다해서 「밤까시」라고 부른다.

섯바탱이

「소해」東南(동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섯바탱이」라고 부른다. 마을주위에 돌이 많아서 「석바탱이」라 불렀는데, 변해서 「섯바탱이」라고 부르며 또한 「석소탕」이라고도 부른다.

소 재

「소성리」에서 永保里(영보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소재」라 부른다. 고개가 소를 닮았다 해서 소가 누워있는 形局(형국)이라 「소재」「솟재」라 부르고 고개 아랫마을을 「소재」「솟재」라고 山名따라 부른다. 永保里(영보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延安李氏(연안이씨)들의 山所(산소)가 있다.

중부뜸

「수해」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중부뜸」이라고 부른다. 「수해」와 「소재」사이에 자리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과 마을사이에 있다해서 「중부뜸」이라고 부른다.

수 해

「수해」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이 「수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牛浦(우포)」라고도 부르는데 臥牛形(와우형)인「솟재」고개 변두리에 자리해 있다해서 「牛浦(우포)」,「수해」라고 부른다.

元山島(원산도)의 集團信仰(집단신앙)

元山島內(원산도내)에는 여덟곳의 크고 작은 마을들이 있는데 이곳 住民(주민)들의 外形的(외형적)인 生活形態(생활형태)는 同一(동일)하지만 集團信仰(집단신앙)의 內面(내면)은 마을마다 서로 다르다. 各各(각각)의 마을에서는 서로 다른 堂山(당산)에 서로다른 堂神(당신)을 모시고 서로 다른 형태와 내용의 集團祭儀(집단제의)를 거행하여 오고 있다. 그리하여 이곳 주민들의 信仰 對象(신앙 대상)을 보면 고양할머니, 호랑이, 말신, 각시신, 지황신 등 매우 특이하고 多樣(다양)함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堂祭(당제)라 하더라도 祭日(제일)이 일정치 않고 祭(제)의 방법이 서로 다르다. 이러한 祭儀(제의)를 보통은 <당제>라 하지만 곳에 따라서 <당제 모신다>, <진고개><지지황제>,<사창>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의는 일반적으로 堂山(당산)에 위치한 <당집>에서 거행하지만 마을에 따라서는 堂山(당산)에 의막(차일)을 設(설)하고 그곳에서 祭(제)를 거행하는 곳도 있고 굳이 우물가에서 거행하는 마을(사창)도 있다.
이러한 元山島內(원산도내)의 묘우(당집)중 代表的(대표적)인 것으로는 선촌의 묘우와 진촌의 묘우를 들 수 있다.
먼저 선촌의 당을 보면 당산 중턱의 소나무숲속에 위치한 2坪(평)정도의 大造瓦家(대조와가)로서 <당,당집,각시당,사당>이라 부르고 있는 이 당집은 한쪽이 거의 쓰러져가고 있는 古家(고가)로 짙은 古風(고풍)을 풍겨주고 있다. 이<당>집 용마루의 東側(동측) 귀면와에는 <康熙(강희)13年 갑인 九月保寧(구월보령)>이란 문양이 새겨져 있어 지금부터 삼백년전 淸(청)나라 康熙(강희)13年 즉 1674年에 보령에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鎭村(진촌)의 당집은 당산 정상의 시멘트벽에 기와로 덮인 1坪(평) 정도의 묘우로서 <萬寧堂(만령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 현판의 左側(좌측) 壁(벽) 윗부분에는 <元山神堂重修記(원산신당중수기)>라 새겨진 額板(액판)이 걸려있는데 여기에 보면 <人間(인간)을 보호하는 것은 靈(영)이요 그 靈(영)이 거하는 곳은 당이니 이곳 당에 靈(영)을 安置(안치)하고 그 靈(영)에게 풍어, 풍농을 雨順風調(우순풍조)와 諸(제)질역을 물리쳐 주기를 기원한다>는 內容(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이 額板(액판)의 말미에 <숭정四丙午六月(사병오육월)>이란 이란 句(구)가 보이는데 이는 곧 1906년의 병오년으로 이때 重修(중수)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처럼 선촌의 사당이나 진촌의 만령당은 元山島內(원산도내)의 代表的(대표적)인 집단祭典處(제전처)로써 짙은 古風(고풍)을 풍겨주고 있다.
그리고 마을마다 거행하고 있는 당제의 對象神(대상신)을 보면 마을마다 독특한 神(신)을 모시고 있음을 알수 있다.
船村(신촌)에서는 그들의 堂神(당신)을 <산신, 당산할머니, 혹은 각시신>이라 지칭하고 있는데 이것은 住民(주민)들의 對象神(대상신)의 山神(산신)이며 그 신은 女神(여신)임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촌의 경우는 <馬(마)>를 대상신으로 하고 있으며 초전에서는 <고양할머니><슈신><지황신><山神(산신)><호>등을 그들의 守護神(수호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神(신)은 대부분 女性神(여성신)으로 神堂(신당)에 여자의 옷이나 화장품을 바치고 있다.
따라서 神(신)을 表示(표시)하는 神體(신체)도 마을에 따라 다르다. 초전의 例(예)를 들면 초전의 당집에는 진흙을 빚어만든 고양이象을 모시고 <고양할머니>라 부르는데 이 고양이는 뒷다리중 한쪽 다리가 없어진 것으로 고양이의 뒷다리가 없어진 이유는 마을에 호랑이가 침범했을 때 고양이가 쫓아내다가 한쪽다리를 잃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이는 주민들이 자기들이 받드는 고양이를 초자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
한편 진촌의 堂神(당신)은 말로서 <말서낭>이라 하고 당내의 神主(신주)로 철제 마상을 안치해 두었으나 모두 도난당하고 지금은 土製(토제)인지 도제인지 알 수 없는 各種(각종) 動物像(동물상) 11點(점)이 당사내 선반위에 놓여있다. 이러한 動物像(동물상)은 매년 堂祭(당제))를 거행할 때마다 한 개씩 만들어 바친 것으로 되어있다. 이 祭典(제전)에 動物像(동물상)을 바친 理由(이유)는 성폐공희의 一種(일종)으로 祭時(제시)마다 神(신)을 위하여 성폐로서 動物(동물)을 한 마리씩 바쳐야 하는데, 매년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산동물 대신 흙으로 동물을 만들어 바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動物像(동물상)은 산動物(동물)을 代身(대신)하는 模造動物(모조동물)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祭物(제물)이 다르고 그 祭儀(제의) 對象神(대상신)이 서로 다른 원산도의 각 마을에서는 그 祭儀(제의)의 日子(일자) 또한 각기 다르다. 그러나 堂祭(당제)는 正初(정초)에서 중순경에 택하여져 행해지고 있으며 제주를 선정한 날로부터 부정이 있을 경우 다음날로 연기된다.
제주는 부락의 성인남자중 각종의 부정이 없는 사람을 선정, 결정하는데 보통 祭(제)10~15日前(전)에 대동계에서 구두호천으로 결정한다. 제주는 선정날부터 대문에 금줄을 늘이고 門前(문전)에 황토를 펴, 잡인과 부정의 來入을 금하며 자신도 정결한 몸과 마음을 갖고 금기사항을 지키는데 대부분 제가 끝나면 금기도 해제되나 곳에 따라 1年동안 지켜지기도 한다.
한편, 주민들도 부정을 금하고 몸과 마음을정결히 하고 집안팎을 깨끗이 한다. 특히 제기간동안에 産苦(산고)가 예상되는 婦女子(부녀자)는 他部落(타지방)으로 피신하여 祭(제)가 끝난 뒤에 돌아오는데 진촌의 경우엔 <엑막고랑>이 있어 그곳으로 피신하였다.
祭儀(제의)는 보통 堂山(당산)의 묘우에서 1次祭儀(차제의)가 거행되나 곳에 따라 2次 堂祭(차당제)를 거행하기도 한다.
祭物(제물)은 메, 탕, 시주, 조라, 포, 과일 등을 비롯해서 牛(우)1두나 豚(돈)1두를 陳設(진설)하는데 이때의 경비는 대동계에서 충당하거나 아니면 各戶(각호)에서 추렴하여 충당한다.
제의의 절차는 극히 간소화하였으나 船村(선촌)의 例(예)를 들면 대단히 거창하다. 먼저 堂山(당산)에서 1次祭儀(차제의)를 거행하고 당산기슭에서 마을굿을 거행한다. 이 굿은 내륙으로부터 招致((초치)된 10여명의 단골무당과 광대들에 의해 하루밤 이틀낮동안 무당의 열두거리굿을 비롯하여 광대들의 각종기예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의 마을에서 제주와 부정이 없는 몇사람이 堂山(당산)에 올라 간단한 祭(제)를 올리고 하산하여 祭主室에(제주실) 모여 마을사람과 飮福(음복)을 하고 許食(허식)을 하는 파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구지같은 마을에서는 祭(제) 다음 날을 「후렛날」「후령날」이라 하여 이날 하루를 전 주민이 모여 먹고 마시며 즐기기도 한다.

校成里(교성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다가 조선말엽(朝鮮末葉)엔 오천군(鰲川郡) 천동면(川東面)의 지역(地域)으로서 오천향교(鰲川鄕校)가 있으므로 「향교골」「생교골」이 변하여「생젓골」또는「교동(校洞)」이라 하였는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웅포동(雄浦洞), 호접동(蝴蝶洞), 김신리(金神里), 태현리(台峴里), 내웅리(內雄里), 금암리(金岩里) 일부와 장척면(長尺面)의 오곡리(烏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교성리(校成里)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오천면(鰲川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오천면 교성리로 되었다.

웅 개

「호젓골」북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웅개」라고 부른다. 山이 삼면으로 웅장하게 둘러있고 한면은 바다에 접하고 있는 마을이며 마을안은 땅이고 바깥은 갯가라는 뜻에서 「웅개」「웅포」「웅포리」라 부른다 한다.

태 현

「김신(金神)」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태현(胎峴)」또는 「지장굴」이라고 부른다. 주포(周浦)의 진당산을 마주보고 있는 태봉산(胎峯山) 아래에 자리해서 산명(山名)을 본따서「胎峴(태현)」또는 「지장굴」이라고 부른다.

밧웅개

「웅개」바깥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밧웅개」라고 부른다. 「웅개」마을 바깥쪽으로 자리한 마을이다. 바다에 주벅을 매서 생업(生業)을 하는 마을로「외웅」「외웅리」라고도 부른다.

북배섬

百濟(백제)때는 이섬을 다고섬이라 불렀다 한다. 그 연유인즉 川北面洛東里永島(천북면낙동리영도)(빈섬)美人島(미인도)라 불리어 왔으며 현재는 빈섬이라 부르고 있다. 이 섬에서 美人(미인)이 많이 난다고 해서 미인도라 하였는데 웬일인지 美人(미인)이 나면 成長(성장)하여 빛을 보지못하고 죽어가는지라 隣近住民(인근주민)들은 異常(이상)히 여겨 오던중 하루는 어느 道師(도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異常(이상)함을 묻자 道師(도사)가 하는 말이 그런 理由(이유)가 있노라 하면서 "저기 저다고섬에서 항상 북쪽을 향하여 拜禮(배례)를 하면서 이 美人島(미인도)를 보고 美人(미인)을 나면 나를 다고 라면서 우두커니 서있으니 그럴 수밖에 있겠느냐"면서 저섬(다고섬)을 북배섬(北拜島)이라 부르라 하니 그때부터 소성리신촌지선(蘇成里新村地先)에 있는 섬을 북배섬이라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그때부터 이 美人導(미인도)에 美人(미인)이 나지않아 빈섬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하나 그 事實(사실)을 立證(입증)할만한 자료가 없이 傳說(전설)로써 내려오고 있다. 현재 이 북배섬에도 人口(인구)가 約(약)30명 정도 살고있는 현상이다.

道美港(도미항)

참생골 북쪽 해변에 빙섬을 마주보고 마을이 있다. 예전 廣川浦口(광천포구)로 큰배가 드나들때는 매우 번창도 하였으나 지금은 조용한 갯마을이며, 여기에는 도미(都美)라는 가련한 설화가 있는 마을이다. 자세한 것은 청소면 戰馬坪(전마평)과 관련되어 있어 그리로 옮긴다.

김 신(金神)

김신은 보령현 김신면으로써 김신이란 市場(시장)을 말하며 육지산물과 해산물의 물물교환을 하던 곳이다. 오천군에 편입되었다가 보령군 오천면이 되었다.

금바위

「소로구지」남쪽으로 玉女峰(옥녀봉)) 아래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금바위」라고 부른다. 玉女(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을 하고 있는 바위인데 이 바위 아래에 자리한 마을도 바위名(명)따라서 「금바위」라고 부른다.

당모랭이

「내웅」남쪽으로 모롱이가 있는데 이 모롱이를 「당모롱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서낭당이 있는 곳이라 「당모랭이」라고 부른다.

소로구지

「외웅」북쪽으로 자리한 마을을 「소로구지」라고 부른다. 「서룡곡」「서룡곶」이라고도 부르는 마을로서 작은 길이 있는 한쪽에 자리하였다 해서 그리 부르며 龍(용)이 바다쪽으로 나가기 위해 웅크리고 앉아있는 마을이라서 마을이 크게 된다 하는데 龍水(용수)가 땅속에서 솟기를 기다린다 한다. 「서룡곡」「서룡곶」이라고도 부른다.

찬샘골

「소로구지」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찬샘골」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찬샘이 있다해서 「찬샘골」이라고 부른다 한다. 「참샛골」이라고도 부른다.

호젓골

「생젓골」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호젓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마을에 절이 있었다. 땅의 모양이 나비를 이루었다 해서「호젓골」「호접동(蝴蝶洞)」이라고 부른다 한다.

葛峴里(갈현리)

백제(百濟)때는 新村縣(신촌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新邑縣(신읍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保寧縣(보령현)에 속했었다. 朝鮮(조선)때는 保寧縣(보령현)에 속했다가 李朝末葉(이조말엽)엔 오천군(鰲川郡) 천동면(川東面)의 地域(지역)인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에 따라 연정리(蓮亭里), 갈두리(葛頭里), 지동(芝洞)과 석현리(石峴里), 산수동(山水洞) 各一部(각일부)와 장척면(長尺面)의 구수동(九水洞) 一部(일부)를 병합하여 갈두(葛頭)와 석현(石峴)의 이름을 따서 갈현리(葛峴里)라 하여 보령군(保寧郡) 오천면(鰲川面)에 편입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오천면 갈현리로 되었다.

석현(石峴)

산숫골 북쪽에 있는 고개를 석현, 돌고개라고 부르고 그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도 고개 지명따라 석현, 돌고개라고 부른다. 오천읍내로 들어가는 고개인데 돌이 많으므로 석현, 돌고개라고 부른다. 그 아래에 마을이 있다.

산숫골

연젓골 북쪽에 있는 마을을 산숫골이라고 부른다. 또한 산수동이라고도 부른다. 대흥산아래에 자리한 마을로 산과 물이 매우 아름다움으로 산숫골, 산수동이라고 부른다.

烏浦里(오포리)

百濟(백제)때는 新村縣(신촌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新邑縣(신읍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保寧縣(보령현)에 속했었다. 朝鮮(조선)때는 保寧縣(보령현)에 속했다가 朝鮮末葉(이조말엽)엔 오천군(鰲川郡) 천동면(川東面)의 地域(지역)인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호포리(狐浦里), 심동(深洞), 수정동(水晶洞), 선동(蟬洞), 양촌(陽村), 금암리(金岩里) 일부를 병합하여 오동(烏洞)과 호포(狐浦)의 이름을 따서 「오포리(烏浦里)」라 하여 보령군(保寧郡) 오천면(鰲川面)에 편입(編入) 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오천면 오포리로 되었다.

水晶洞(수정동)

「매미골」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수정동(水晶洞)」「수침골」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數百年(수백년)된 노송(老松)이 있고 그 아래에 샘이 있는데 물이 수정같이 맑다해서 맑은 샘이 있는 마을이라 「水晶洞(수정동)」「수침골」이라고 부른다.

狐 浦(호포)(여수해)

「지픈골」西北(서북)쪽으로 마을이 잇는데 이 마을이 「호포」「여수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마을지형이 여우처럼 생겼다 해서 「호포(狐浦)」「여수해」라고 부르는데 강변에 한때는 여수굴이 많아서 여우가 있었던 곳이다. 현재 고정화력발전소의 설치구역으로 산과 마을이 타지역으로 이주케 되어 옛지명은 전설로 남을 것이다.

蟬 洞(선 동)

「가그말」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선동(蟬洞)」이라고 부른다. 「매미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오포리에서 큰 마을이며 매미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해서 「선동(蟬洞)」「매미골」이라고 부른다.

深 洞(지풍굴)

「심동(深洞)」은 글자그대로 깊은굴이며 깊은골이라 부르는 조그마한 마을인데 동네입구에서 올라가보면 개국공신충무공조영무(開國功臣忠武公趙英茂) 십일대손 한양조공유복(十一代孫漢陽趙公惟復)의 묘(墓)를 중심으로 갈라졌는데, 동쪽고을에 유복(惟復) 주택(住宅)이 있었고 그 거실문전에 청충제(淸忠齊)란 縣板이 걸려 있어서 청충제골이라고 부르며, 남쪽으로는 1㎞거리 주포면과의 경계에 조그만 봉오리가 있는데 조진사(趙進士)는 항상 그 봉오리를 바라보고 국사(國事)를 생각했다하여, 그 봉오리를 국사봉이라 부른다.

가그말(烏 村)

「매미골」동쪽으로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가그말」이라고 부른다. 「오」「오동」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에 가그매(까마귀) 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해서 「가그말」「오암」「오동」이라고 부른다.

사락배

「가그말」남쪽에 사락배(士樂岩)라는 마을이 있는데 바위형이 선비가 즐겨 놀던 바위라고 한다. 자연의 경치가 극히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간척지로 물이 적어 바위와 인가만 남아있다.

효자도리(孝子島里)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말엽(朝鮮末葉)엔 오천군(鰲川郡) 하남면(河南面)의 지역(地域)으로서 효자(孝子)가 많이 났으므로 소자미(小慈味)라고 부르던 地域(지역)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육도리(陸島里), 추도리(抽島里), 월도리(月島里), 소도리(蔬島里), 목도(鶩島), 안마도(鞍馬島), 흑도(黑島), 목도(木島), 허륙도(虛陸島), 삼형제도(三兄弟島), 몽덕도(夢德島), 황도(黃島)를 병합하여 효자도리(孝子島里)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오천면(鰲川面)에 編入(편입) 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오천면 효자도리로 되었다.

抽 島(추도)

「소도(蔬島)」북쪽에 섬이 있는데 이 섬을 「추도(抽島)」라고 부른다. 「빼섬」이라고도 부르는 섬인데 섬 춤에서 안면도 쪽으로 쑥 빠져있는 섬이다. 人口(인구)는 約(약) 100명이며 家戶(가호)는 14戶(호)로 도선(渡船)도 한척 보유하고 있는 섬이다. 주벅이 많아서 부유한 섬이다.

陸 島(육도)

「추도(抽島)」北東(북동)쪽으로 자리한 섬이다. 여섯 개의 섬이 오손도손 모여 있는데 그 섬 가운데서 지대가 가장 높고 육지(陸地)와 가까운 섬이라 「육도(陸島)」라고 부르는 섬이다. 人口(인구)는 87명 家戶數(가호수)는 14세대(世帶)로 도선(渡船)이 한척있으며 국민학교 분교도 있다.

鶩 島(목도)

「황도(黃島)」와「육도(陸島)」사이에 섬이 있는데 이 섬을 「목도(鶩島)」「나무섬」이라고 부른다. 섬에 나무가 많다해서 「목도」「나무섬」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살지않는 무인도인데 한때 토끼, 염소를 放牧(방목)하였던 섬이다.

蔬 島(소도)

「효자도(孝子島)」북서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섬을 「소도(蔬島)」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야채가 잘되는 섬이라 「소도(蔬島)」라 부른다. 지금 人口(인구)는 76명이며 家戶(가호)는 12戶(호)다.

月 島(월도)

「왁새섬」북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 「월도(月島)」라고 부른다. 섬이 반달처럼 생겼다 해서 「월도(月島)」라고 부른다. 「월섬」이라고도 부르는 섬인데 반달같은 섬이라 15夜(야) 밝은 달이면 15字(자)가 들어맞는다 하며 섬에 15戶以上(호이상) 살게되면 불운(不運)이 온다해서 15戶以上(호이상) 집이 늘어나지 못하게 한다. 섬에 밭이 없고 물이 없다. 물이 나오지 않아서 육지에서 길어다 마신다. 바위섬이라 현재 집은 13戶(호)있으며 인구(人口)는 78명이 살고있는 섬이다. 동력선(動力船)이 2척(隻) 무동력선이 6척 있으며 도선(渡船)이 있다.

검은여

「황도(黃島)」북쪽에 있는 작은섬을 「검은여」라고 부른다. 사람이 살지않는 무인도(無人島)인데, 바위가 검다하여 「흑도」라고 부른다. 「무인도」라고도 부른다.

蒙德導(몽덕도)

「효자도(孝子島)」내「명덕」마을 북동(北東)쪽에 자리한 섬을 「몽덕도(蒙德島)」라고 부른다. 물이 들어오면 가라앉고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섬이다.

三兄弟島(삼형제도)

「빼섬」동쪽에 자리한 바위섬을 「삼형제섬」이라고 부른다. 큰 바위 셋이 나란히 서있는 섬이다.

鞍馬島(안마도)

「삼형제바위」동남(東南)쪽에 있는 작은섬을 「안마도(鞍馬島)」라고 부른다. 섬이 말안장처럼 생겼다 해서 「안마도(鞍馬島)」라고 부른다.

빈육도

「육도(陸島)」남쪽으로 자리한 마을을 「빈육도」라고 부른다. 주벅에서 잡은 멸치를 쪄서 상품으로 만드는 시설이 갖춰진 섬이며 멸치가 많이 나오는 섬으로 알려져 있다. 「허륙도」라고도 부른다.

왁새섬

「빈육도」동쪽에 섬이 있는데 이 섬을 「왁새섬」이라고 부른다. 섬이 왁새처럼 생겼다 해서 「왁새섬」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無人島)다.

孝子島(효자도)

「원산도(元山島)」를 마주보고 자리한 섬을 「효자도(孝子島)」라고 부른다. 원래는「소자미(小慈味)」라고 부르던 섬인데 옛날부터 효자(孝子)가 만이 남으로 「효자도(孝子島)」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다. 섬안에는 「아랫말」「녹사지」「웃말」「명덕」등 마을이 있다. 가호(家戶)가 76戶(호)이며 인구(人口)는 470명이 현재 살고있는 섬인데 국민학교도 있으며 여객선(旅客船)이 매일 다닌다. 어업이 주업인 섬이다.

元山島里(원산도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고려(高麗)때는 고만도(高巒島)라 불렀었다. 조선(朝鮮)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오천군(鰲川郡) 하남면(河南面)의 지역(地域)으로써 고란도(弧蘭島)라 불렀었다. 원래 산이 있었던 地域(지역)이라 元山島(원산도)라 고쳐 부르고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에 따라 선재리(船材里), 진고지리(津串之里), 점촌리(點村里), 진촌리(鎭村里), 초전리(草箭里), 사창리(射倉里), 구티리(鳩峠里), 저두리(猪頭里), 외죽리(外竹里), 증도(甑島), 군관도(軍官島)를 병합하여 「원산도리(元山島里)」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오천면(鰲川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리로 되었다.

점 말

「구티(鳩峠)」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점말」「點村(점촌)」「點村里(점촌리)」라고 부른다. 옛날에 옹기점이 있었던 마을이다.

도투머리

「원산도(元山島)」東南(동남)쪽 끝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도투머리」또는 「저두리(猪頭里)」라고 부른다. 마을 地形(지형)이 멧돼지처럼 생겼다 해서 「도투머리」「저두리(猪頭里)」라고 부른다.

五老峯(오로봉)

「풋사리」남쪽으로 높은 山이 있는데 이 山을「오로봉(五老峯)」이라고 부른다. 산이 다섯 봉오리로 되어 있으며 조선(朝鮮)때는 봉수대(熢燧臺)가 있어서,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정에 알리는 「봉화(烽火)를 올렸던 산이다.

사 창(社倉)

「구티리」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사창(社倉)」이라고 부른다. 조선(朝鮮)때 사창(社倉)이 있어서 곡식 3500여섬을 저장하였던 창고가 있었다 해서 「사창(社倉)」이라고 부른다.

진 촌(鎭村)

「사창(社倉)」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진말」「진촌(鎭村)『이라고 부른다. 조선(朝鮮)때 관가(官家)가 있어서 관인(官人)이 있었던 마을이라 「진말」「진촌(鎭村)」이라고 부른다.

진고지
「신촌(新村)」南東(남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진고지」「진관지리」라고 부른다. 옛날 육지로 왕래하는 나루터가 있었던 마을이다.

구 티(鳩峠)
「점촌」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구티(鳩峠)」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마을에 비둘기가 날아오기 시작하더니 많은 비둘기들이 마을에 살게 되었었다. 이 마을에만 비둘기가 모여 살았다 하여 「구티(구상)」라고 불렀는데 변해서 「굿지」라고도 부른다.

軍官島(군관도)

「풋사리」북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군관도(軍官島)」라고 부른다. 섬이 바위로 되어 있는데 조선(朝鮮)때 오천(鰲川)에 있는 수군절도영(水軍節度營)의 입구가 되어 마치 수군영(水軍營)의 파수(把守)를 보는 군관(軍官)처럼 생겼다해서「군관도(軍官島)」라 부르는 섬이다. 「군개무니」라고도 부른다.

선 촌(船村)

「진고지(津串之)」西北(서북)쪽으로 자리해 있는 마을을「선촌(船村)」이라고 부른다. 「선촌리(船村里)」라고도 부르는데 원산도(元山島)에 들어오는 문호(門戶)로서 선박의 출입이 많은 마을이다. 배가 많이 출입하는 마을이라 「선촌」이라고도 부르며 원산도(元山島)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시루섬

「진말」북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 「시루섬」이라고 부른다. 「중도」라고도 부르며, 섬이 떡 시루처럼 생겼다 해서「시루섬」이라고 부른다.

外竹島(외죽도)

「선촌」북쪽에 자리한 섬을 「외죽도(外竹島)」라고 부른다. 원산도(元山島)의 바깥섬으로써 대나무가 무성했던 섬이라 「외죽도(外竹島)」라고 부른다.

원산별장(元山別莊)터

「진촌(鎭村)」에 옛날부터 「원산별장(元山別莊)터」로 부르는 집터가 있다. 옛날에 홍주목사(洪州牧使)가 원산도에 들렀다가 섬의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이곳에 별장을 짓고 때때로 휴양을 왔었다 한다. 홍주목사의 별장이 있었던 집터라 「원산별장(元山別莊)터」라고 부른다.

풋사리

「진촌(鎭村)」北西(북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풋사리」「풋살」「초전리」라고 부른다. 마을앞에 마을사람들이 살(漁箭)을 많이 매고 고기를 잡는 마을이라「풋사리」「풋살」「초전리」라고 부른다.

점 마

조선(朝鮮)때 제주도(濟州道)에서 말을 육지로 실어와서 말을 길들일 때 이곳에도 말을 떼놓고 말을 길들여서 군마(軍馬), 역마(驛馬)로 실었갔다 한다. 말을 길들인 곳인데 그후 말은 모두 육지로 보내고 마을이 생기자 마을이 들어섰다. 「점마」라고 부르는데 말을 길들였던 땅이란 뜻이다.

元山島(원산도)

충청남도(忠淸南道)에서는 두 번째로 큰섬으로 「효자도(孝子島)」서쪽으로 안면도(安眠島) 남쪽으로 자리한 섬이다. 옛날에는 「고만도(高巒島)」「고란도(弧蘭島)」라 불렀던 섬으로 조선말엽(朝鮮末葉)에 와서 「원산도(元山島)」라고 섬명을 고쳤다. 현재 섬의 인구는 約(약)3000명이며 가호(家戶)는 290여세대(餘世帶)다. 어업(漁業)에 종사하는 섬사람도 많지만, 농업(農業)에 종사하는 사람도 많은 섬으로 섬안에 병원도 있으며 중학교(中學校)도 자리해 있다. 여객선(旅客船)이 하루 매시간 다니는데 문화수준이 높은 섬으로서 옛부터 경치좋은 섬으로 손꼽혔던 곳이다. 원산도(元山島)해수욕장(海水浴場)은 모래가 고와서 여름에는 많은 객들이 모이는 섬이다.

삽시도리

馬韓(마한)때 벌써 人類(인류)가 定着(정착)해서 살던 섬이다. 百濟(백제)때는 新村縣(신촌현)에 속했고 新羅(신라)때는 新邑縣(신읍현)의 地域(지역)이였다. 高麗(고려)때는 保寧縣(보령현)에 속했고 朝鮮(조선)때는 保寧縣(보령현)에 속했다가 朝鮮末葉(조선말엽)엔 鰲川郡(오천군) 河西面(하서면)의 地域(지역)으로써 화살(矢)이 꽂힌 활(弓)같다 해서「揷矢島(삽시도)」라 하였는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삽시도(揷矢島)」와「고대도리(高代島里)」,
「외검도리(外검島里)」,「외장고도리(外長古島里)」,
「불모도리(佛母島里)」,「오도(烏島)」,「납대지도(納大只島)」를 병합하여 「삽시도리(揷矢島里)」라하여 오천면(鰲川面)에 편입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로 되었다.

古代島(고대도)

「삽시도(揷矢島)」북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 「고대도(古代島)」라고 부른다. 섬에 옛 집터가 많아서「古代島(고대도)」「古垈島(고대도)」라 부른다. 옛부터 마을이 形成(형성)되었던 섬으로, 우물이 6個所(개소) 있으며 人口(인구)가 500餘名(여명)이며 家口數(가구수)가 100戶(호) 가까이 되는 섬이다. 도선(渡船)도 一隻(일척)이있으며 국민학교도 있는 섬으로서 옛날에는 外煙島(외연도) 밖으로 홍어잡이를 주로 하던 섬이다.

길응암(吉應岩)

「외점도」 西南(서남)쪽으로 바다 가운데 있는 마을을「길응암」이라고 부른다. 바다 가운데에 매처럼 앉아 있는 바위라 「길응암」이라고 부른다.

납작도

「삽시도」동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 「납작도」라고 부른다. 「납대기도」「납대지도」라고도 부르는데, 네모가 반듯한 되처럼 생겼다 해서 「납작도」「납대기도」「납대지도」라고 부른다.

內波水島(내파수도)

「파수도」안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섬을「內波水島(내파수도)」「안파수도」라고 부른다. 「파수도」안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집은 두가구가 있으며 사람은 13人(인)이 살고있는 섬이다. 배가 한척있고 해초(海藻)와 조개로 생업을 주로 이어 나가는 섬이다.

밧파수도

「파수도」바깥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 「밧파수도」라고 부른다. 「외파수도」라고도 부르는데「파수도」바깥쪽에 자리한 섬이라「바갓파수도」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밧파수도」라 부른다 한다.

佛母島(불모도)

「삽시도」남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 「불모도(佛母島)」라고 부른다. 한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해서 이곳에서 불공을 드렸다는 섬이라하여 「불모도(佛母島)」라고 부른다 한다. 五家戶(오가호)가 살며 사람은 20명 정도가 살고 있따. 漁船(어선)이 3隻(척)있고 밭에 콩(豆)을 심고 조개가 많이 나오는 섬이다.

揷矢島(삽시도)

「삽시도리(揷矢島里)」에서 가장 큰 섬이다. 섬에도「삽시도」라는 마을이 있다. 섬의 모양이 화살(矢)을 꽂은 활(弓)과 같다해서 「삽시도(揷矢島)」라 부르는 섬이다. 섬엔 168家戶(가호)에, 850명 가량의 사람이 살고 있으며 농가(農家)가 15戶(호)이고, 나머지는 대개의 경우 어업(漁業)에 종사하고 있다. 섬엔 국민학교도 있고 양조장도 있는데 자급자족하는 부유한 섬이다. 도선(渡船)이 二隻(이척)이나 있다. 元山島(원산도)밖으로 자리한 섬이며, 이곳에는 洪累來亂當時(홍루래난당시) 많은 군사가 조련하였다는 設(설)이 있으며 지금도 화살촉을 발견할 수 있고 이곳 개척에 절대적 공훈을 세운 朴英三先生(박영삼선생)을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위홍서

「불모도(佛母島)」남쪽으로 바다 가운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상홍서(上洪嶼)」「위홍서」라고 부른다. 조수(潮水)가 들어오면 바위가 물에 묻히고 조수가 빠지면 드러나는 바위다. 「위홍서」아래에도 이와 똑같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아래홍서」「하홍서」라고 부른다.

오 도(烏島)

「삽시도(揷矢島)」서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오도(烏島)」라고 부른다. 섬이 까마귀처럼 생겼다 해서「오도(烏島)」라고 부르는 섬이다.

외 도(外島)

「외장고도(外長古島)」北西(북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곳에 섬이 있는데 이 섬을 「외도(外島)」라고 부른다. 바깥쪽에 자리한 섬이라 「외도(外島)」라고 부르는데 섬에는 가옥(家屋)이 세가구 있고 인구(人口)는 27명이 사는데 어업(漁業)과 농업(農業)이 반반인 섬이다. 동력선(動力船)도 一隻(일척)있으며 우물이 하나 있는 섬이다. 서산군(瑞山郡) 안면면(安眠面) 신야리(新野里) 서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外點島(외점도)

「불모도(佛母島)」서쪽으로 밖에 있는 섬을「외점도(外點島)」「외검도」라고 부른다. 「불모도」바깥쪽으로 자리한 마을이라 「외점도(外點島)」라 부른다.

龍 島(용도)

「위홍서」동쪽으로 섬이 있는데 여기를「용도(龍島)」라고 부른다. 옛날엔 용(龍)이 나온 섬이라 해서「용도(龍島)」라고 부른다.

長古島(장고도)

「고대도(古代島)」西北(서북)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장고도(長古島)」「장구섬」「장고섬」「외장고도」라고 부른다. 섬 地形(지형)이 장구처럼 생겼다 해서 그리 부르는데, 서산군(瑞山郡) 안면면(安眠面) 누동리(樓洞里)에 딸린「長古島(장고도)」의 바깥에 자리한 섬이다. 섬의 인구는 430명이며 가호(家戶)는 76棟이고 도선(渡船)도 한척 있다. 그리고 여객선(旅客船)이 매일 한차례씩 왕래하는 섬인데 어업에 종사하는 가호(家戶)가 65戶(호)나 된다. 민요(民謠)와 민속놀이가 있는데 민속놀이「등마루」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민속놀이이다. 「장고도(長古島)」안에 자리한 「장곰」은」「장고도」의 유일한 마을이다.

鹿島里(녹도리)

馬韓(마한)때부터 人類(인류)가 定着(정착)해서 살던 섬이다. 百濟(백제)때는 新村縣(신촌현), 新羅(신라)때는 新邑縣(신읍현)의 地域(지역)이였으나 行政(행정)은 미치지 않았고 高麗(고려)때 保寧縣(보령현)에 속해서 조공미를 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行政(행정)이 미쳤음을 알 수 있다. 朝鮮(조선)때는 保寧縣(보령현)에 속하여 朝鮮末葉(조선말엽)엔 오천군(鰲川郡) 하서면(河西面)의 地域(지역)인데, 사슴처럼 생긴 섬이 있어서 「녹도(鹿島)」라 하였는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호도리(狐島里), 석도(石島), 화사도리(華沙島里), 길산도(吉山島), 외점도(外點島), 명덕도(明德島)를 병합하여 녹도리(鹿島里)라 해서 보령군(保寧群) 오천면(鰲川面)에 편입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오천면 녹도리로 되었다.

毛 島(모도)

「녹도(鹿島)」서쪽에 있는 작은 섬을「모도(毛島)」라고 부른다. 섬이 작으며 마치 털(毛)과 같다해서 「모도(毛島)」라고 부르는 섬이다.

대화사도

「花沙島(화사도)」가운데서 가장 큰 섬이다. 바다위에 떠있는 이섬 물위에 잔바위가 많아서 해가 뜰때는 빛이 나는데, 마치 꽃과 같이 눈부시다 해서「大花沙島(대화사도)」라 부른다.

吉山島(길산도)

「호도(狐島)」서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길산도(吉山島)」라고 부른다. 섬이 3個(개)가 있는데 「길산도(吉山島)」에서 가장 큰섬은 「대길산도(大吉山島)」라고 부른다. 질미 바다에 놓인 섬으로 작은 고기가 많이 잡히며 석태(石苔)가 많이 나온다. 「중길산도(中吉山島)」는「대길산도(大吉山島)」동쪽에 있고 「소길산도(小吉山島)」는「中吉山島(중길산도)」동쪽에 있다.

녹 도

「녹도리(鹿島里)」의 중심에 있는 섬이다. 섬이 사슴처럼 생겼다 해서「사슴」「녹도(鹿島)」라고 부른다. 바위가 많아서 급경사진 곳에 마을이 있고, 李氏(이씨)들이 가장많이 살며, 鄭氏(정씨), 朴氏(박씨) 등이 주로 사는 마을이라 馬韓(마한)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섬이다.

明德島(명덕도)

「호도」북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섬을 「명덕도(明德島)」라고 부른다. 벌이 명덕처럼 생겼다 해서「명덕도(明德島)」라고 부른다.

石 島(석도)

「녹도」동쪽으로 작은 섬이 있는데 이 섬을「석도(石島)」라고 부른다. 돌로 되어있는 섬이다.

소화사도

「대화사도(大華沙島)」北東(북동)쪽에 있는 작은 섬을「소화사도(小華沙島)」라고 한다.

주 서(周嶼)

「대화사도(大華沙島)」서쪽으로 해안에 둘러있는 작은 섬이 있는데 이 섬을「주서」라고 부른다.

추 도(錐島)

「호도(弧島)」동쪽에 있는 작은 섬을 「추도(錐島)」라고 부른다. 모양이 송곳같이 뾰족하다 하여「추도」라고 부른다.

호 도

「녹도(鹿島)」북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호도(弧島)」라고 부른다. 地形(지형)이 여우처럼 생겼다 해서「여우섬」이라고 부른다.

黃島岩(황도암)

「녹도(鹿島)」와「호도(弧島)」사이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황도암(黃島岩)」이라고 부른다. 바위 빛이 누렇다 해서「黃島岩(황도암)」이라고 부른다.

堂 山(당산)

「녹도(鹿島)」에 堂山(당산)이 있고 城徨堂(성황당)이 있다. 섬에서 가장 높은 산 山峯(산봉)에 울창한 松林老木(송림노목)안에 자리한 堂(당)을 城徨堂(성황당)이라 부르고, 城徨堂(성황당)이 있는 산을「당산(堂山)」이라고 부른다.

堂神祭(당신제)

「녹도(鹿島)」에 있는 城徨堂(성황당)에서는 1年에 세 번 堂祭(당제)를 지낸다. 陰曆(음력)으로 八月(팔월)엔 新米祭(신미제)를 지내고 十日月(십일월)엔 無病祇(무병기)祭(제)를, 二月(이월)에는 漁利(어리)를 비는 豊漁祭(풍어제)를 지낸다. 祭禮(제례)때는 特別(특별)한 祝文(축문)이 정해있지 않고 구두(口頭)로 외우면서 행한다. 堂山(당산)의 神主(신주)는 용왕신(龍王神)이 아니고 천신(天神)으로 되어 있다. 항상 당집 近方(근방)에는 새끼로 금줄이 쳐 있어서 신성시(神聖視)하는데 당집 아래와 주위(周圍)에도 금색(禁色)이 쳐있다. 금색한 곳엔 백지(白紙)가 달려 있다. 당집 안에는 神位(신위)도 없도 白紙(백지)로 幣帛(폐백)이 달았을 뿐이다. 平時(평시)에도 사람들이 축원(祝願)이 있으면 찾아갈 수 있게끔 되어 있다. 단, 堂祭(당제)를 지낼때에 산아(産兒)는 부정(不淨)하다 하여 産母(산모)를 堂祭(당제)지내는 동안 他島(타도)에 다녀오도록 하고 堂祭(당제)를 지낸다.

草 墳(초분)

「녹도(鹿島)」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초분(草墳)이라고 해서 시체(屍體)를 짚으로 싸서 나무가지로 엮어 모래밭 위에 얹어두는 묘(墓)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해변(海邊)의 산비탈이나 모래사장에 두는데 이와같은 方法(방법)을 택한 것은 漁業時(어업시)에는 땅을 파면 不吉(불길)하다고 해서 數個月(수개월) 또는 一年(일년) 혹은 十年後(십년후)에 本葬(본장)을 하는 것이라 한다. 풍장(風葬)의 유습(遺習)인데 본장(本葬)은 하지않고 초장(草葬)이 元葬(원장)이고 또한 본장(本葬)을 하더라도 그것은 脫肉(탈육)된 시골(屍骨)을 수용(收拾)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초분(草墳)의 형태(形態)는 녹도(鹿島)의 전통(傳統)인데 쉽게 말해서 흙이 적은 섬이라 초분(草墳)의 형식을 택한것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고 옛 풍습(風習)에 사람의 시체(屍體)를 파묻는다든가 화장(火葬)을 하면 영혼(靈魂)도 소멸하므로 이를 피하는 方法(방법)으로 택하였다 하겠다.

外煙島里(외연도리)

百濟(백제)때는 新村縣(신촌현)에 속했으며 新羅(신라)때는 新邑縣(신읍현)에 속했었다. 高麗(고려)때는 保寧縣(보령현)에 속했는데, 옛날에 中國(중국) 제(齊) 나라의 전횡장군(田橫將軍)이 제(齊)나라가 망하자 군사(軍士) 500을 이끌고 定着(정착)한 섬이라 하는데 李朝(이조)때는 保寧縣(보령현)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오천군(鰲川郡) 하서면(河西面)의 구역으로써 黃海(황해) 가운데 멀리 떨어져서 연기에 가린 듯 까마득한 섬이라 외연도(外煙島)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횡견도리(橫見島里), 황도리(黃島里), 오도(梧島), 대청도(大靑島)를 병합하여 외연도리(外煙島里)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오천면(鰲川面)에 편입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오천면 외연도리로 되었다.

관장도(冠長島)

「외연도(外煙島)」北東(북동)쪽으로 섬이 있는데 「관장도(冠長島)」라고 부르는 섬이다. 섬 모양이 관처럼 생겼다 해서「관장도(冠長島)」라고 부른다.

외연도(外煙島)

「녹도(鹿島)」밖으로 전라북도(全羅北道)사이에 섬(島)이 점재(點在)되어 있는데 이 곳을 「외연열도(外煙列島)」라고 부르고 외연열도(外煙列島)에서 가장 큰 섬을 「외연도(外煙島)」라고 부른다. 육지에서 떨어져 마치 연기에 가린 것 처럼 보인다 해서「외연도(外煙島)」라고 부른다. 忠南(충남)의 最南端(최남단)에 자리하며 中國(중국)에서 우는 닭의 울음소리도 들린다는 西海(서해) 한복판에 자리한 섬으로서 가구수(家口數)는 89戶(호)에 人口(인구)는 530餘名(여명)으로 추산(推算)한다. 어업(漁業)을 생업으로 하는 家口數(가구수)가 76戶(호)나 되는 어촌(漁村)으로서 국민학교가 있고 샘이 다섯 개나 된다. 唐(당)나라 以前(이전)에 中國(중국)에서 전횡장군(全橫將軍)이 500여명을 이끌고 자리하였다는 섬으로, 섬에는 상록수림(常綠樹林)이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로 지정되어 있으며 동백(冬柏)꽃이 또한 유명하다. 행정전화도 가설되어 있으며 도선이 二隻(이척)이나 된다.

橫見島(횡견도)

「횡견도」西北(서북)쪽에 섬이 있는데 이 섬을「횡견도(橫見島)」라고 부른다. 「빗갱이」라고도 부르는데 섬의 형체가 누워있는 것처럼 옆으로 보인다 하여「횡견도(橫見島)」라고 부른다. 사람이 사는 섬인데 家戶數(가호수)는 8戶(호)이며 47명의 사람이 산다. 漁船(어선)이 2隻(척) 있으며 샘이 하나 있는 섬이다.

黃 島(황동)

「橫見島(횡견도)」서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황도(黃島)」라고 부른다. 섬의 흙이 누렇다 해서「황도(黃島)」라고 부른다. 섬에는 집이 일곱채 있으며 인구는 39명이다. 동력선(動力船)이 한척 있고 우물이 하나 있다.

초망서

「무마도(貿馬島)」동쪽으로 작은 섬이 있는 이 섬을「초망서(草芒嶼)」라고 부른다. 섬이 海草(해초)와 풀로 덮혀 있는데 간조(干潮)의 차에 따라 물위로 높아졌다 작아졌다 하는 섬이다.

靑 島(청도)

「외연도(外煙島)」北西(북서)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섬을「청도(靑島)」라고 부른다.
푸른 돌이 많아서「청도(靑島)」라고 부르는 섬이다. 대.중.소의 세 섬으로 되어있고, 모두가 작은 섬들이다.

大靑島(대청도)

「청도(靑島)」중에서 가장 큰 섬이다. 고려(高麗) 25대 충렬왕(忠烈王)때 최유준(崔有準)이 바른말을 하다가 유배되어 이곳에 와서 귀양을 살았다.

오 도

「석도(石島)」남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오도(梧島)」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섬에 오동나무가 많이 야생(野生)해 있다 해서 「오도(梧島)」라고 부른다.

세 여

「횡견도(橫見島)」와「황도(黃島)」사이에 있는 암초를「세여(細如)」라고 부른다. 섬과 섬사이에 작은 바위로 물에 갈앉은 바위라 해서「세여(細如)」라고 부른다.

石 島(석도)

「무마도(貿馬島)」서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석도(石島)」라고 부른다. 섬이 돌로 이루어졌다 해서「석도(石島)」라고 부른다.

貿馬島(무마도)

「외연도(外煙島)」남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무마도(貿馬島)」라고 부른다. 섬의 形局(형국)이 말처럼 생겼다 하는데, 옛날에 오천(鰲川)에 수군영(水軍營)이 있을 때 말을 사들여서 육지로 올렸는데 그 때 말을 싣고 가는 배들이 쉬어간 섬이라 하여「무마도(貿馬島)」라고 부른다.

傳統(전통)가꾸기 鰲川面(오천면)을 마치며 생각하면 이런 事業(사업)이 왜 이제야 생각이 났는가 하는 恨(한)이 서린다. 먼 옛날을 先史時代(선사시대)라 해도 좋고 三國時代(삼국시대)라 해도 좋다. 如何問(여하문) 먼 옛날부터 鰲川(오천)은 西海(서해)의 數多(수다)한 大小(대소)의 섬, 軍事的(군사적)·地政學的(지정학적) 條件等(조건등)으로 數(수)많은 애환이 서리고 傳統(전통)과 人物(인물)이 無數(무수)할 것이나 알 길이 없고, 섬섬마다의 名稱等(명칭등)을 생각할 때 그 무엇인가 있었을 것인데 洞里(동리)의 不充分(불충분)도 있지만 表證(표증)을 찾을 길이 없어 그대로 넘어가자니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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